* 음향장비의 문제로 설교 녹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설교문으로 대체합니다.  



본문: 4:35-41

제목: 마가복음강해 17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1. 도입: 인도네시아지진

얼마전 인도네시아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도 7.5의 강진과 함께 엄청난 쓰나미가 발생했는데 쓰나미 경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쓰나미가 발생한지 25분만에 팔루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을 덮쳤습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수많은 주민들이, 쓰나미에 고스란히 휩쓸려가고 말았습니다. 높은 건물이나 지대가 높은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다 쓰나미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가 2000명을 훌쩍 넘었고, 앞으로 사망자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전망이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면 여러분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성인군자처럼 그것을 맞이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습니다. 작년에는 인디안 써머때 화씨 110도가 넘어가면서 며칠 동안은 엄청나게 더웠는데, 올해는 인디안 써머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비록 집값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가는게 굉장히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년 내내 좋은 날씨가 우리를 기분좋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지진입니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20년내에 진도 8 이상의 엄청난 대지진이 샌 안드레아스 단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샌 안드레아스 단층은 캘리포니아를 관통하는 지진대로서, 샌프란시스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지진대로 인해서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에 대 지진으로 3000명이 사망하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1989년에도 지진으로 인해서 베이브릿지가 끊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지진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진도 8 이상의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또 한번 일어난다면, 이 지역은 아비규환이 벌어질 것이고, 대혼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재해 속에서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자들은 지금 죽는냐 사느냐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밤에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원래 폭풍우가 종종 일어나는 호수로 유명합니다. 이 호수의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폭풍우는 단골 손님처럼 갈릴리 호수에 자주 몰아쳤습니다. 그런데 폭풍우는 주로 낮시간대에 발생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낮 시간이 아닌 주로 밤 시간에 고기잡이를 합니다. 그들이 밤에 고기를 잡았던 이유는, 우선 밤에 고기들이 더 많이 잡혔기 때문이고, 낮에는 이렇게 폭풍우가 호수를 강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밤에 호수를 건너는 것은 낮에 건너는 것에 비해서 훨씬 안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들이 많이 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평소와 달리 평화로운 밤에 느닷없이 폭풍우가 몰아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자연재해중 허리케인이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나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돌발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한밤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우를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한편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풍랑이 심하게 몰아치는 이 순간에, 잠을 자고 있습니다. 폭풍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37절에 보면, 큰 광풍이 일어나서,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습니다. 고물이라는 것은 선미, 배의 뒤쪽 부분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상상이 되십니까? 강한 비바람 때문에 배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 뒤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몸은 반쯤은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 고요한 듯 잠을 자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속에서 폭풍우와 맞서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황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그냥 잠만 자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자신들의 힘만으론 폭풍우를 이겨낼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제발 이 상황속에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자들의 성화에 잠이 깬 예수님은 먼저 폭풍우를 잠재우셨습니다.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여러분, 쓰나미가 몰려와서 필사적으로 그 쓰나미를 피해기 위해서 도망가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지진으로 인해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두려운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엄청난 허리케인으로 인해서, 집이 통째로 날아가버리고, 지하실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속에서 어느 누가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폭풍우로 인해서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호수 혹은 바다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가 굉장히 넓어서 이것을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바다라고 부르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막 4:1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그런데, 성경에서 바다는 통상적으로 사탄의 영역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곳은 혼란한 장소이며 암흑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성경에서 용은 사탄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그 사탄의 우두머리가 바다에 있다는 것은, 바다가 사탄의 영역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바다에서 열 개의 뿔이 달리고, 일곱 개의 머리가 달린 괴물짐승이 나오는데,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바다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크고 깊고 넓은 바다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성경은 대체로 바다를 혼돈과 어둠의 세상,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릴리 바다에서 갑작스럽게 폭풍우가 몰아 닥쳤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갈릴리 호수에서 낮에만 발생하는 폭풍우는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밤에 풍랑이 불어 닥친 것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 아닌, 사탄의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향해 공격했음을 의미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이 넓어져 간다는 것은 사탄의 영역이 점점 좁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낙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영적인 공격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밤에 몰아닥친 폭풍우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39절에 뭐라고 합니까?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바람을 꾸짖고, 바다더러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명했던 것은, 단순히 바람과 바다라는 자연에게 명령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과 바다를 이용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려고 했던 사탄의 세력을 향한 꾸짖음이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이 폭풍우를 맞이한 상황속에서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는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만 바라보면서, 그 현상에 압도되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보다, 사탄의 힘에 눌려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이 훨씬 더 세고 강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제자들의 믿음이 작다는 것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제자들이 바라봐야 하는 것은 폭풍우라고 하는 지금 당장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위기의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폭풍우마저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지금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들을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것처럼 달려들고 있는 폭풍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사탄의 세력들이 제자들을 낙심케 만들기 위해서,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있는 거짓의 영, 사탄의 장난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잠자는 것처럼 보이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무질서하고 혼돈에 빠진 호수를 잠잠하게 만들어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이, 믿음이 있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들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이 있는 상태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후, 40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영적인 안목을 조금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4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우를 무서워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의 두려움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40절에 제자들이 폭풍우를 무서워 했던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Why are you so afraid?” 왜 걱정하느냐, 왜 염려하느냐입니다. 하지만, 41절에 무서워하다는 영어 성경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They were filled with great fear” 또 다른 번역본에서는 “They were filled with great awe” fearawe 는 경외감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폭풍우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 속에서 얼마나 크고 작은 위기를 경험합니까? 모든 것이 잘 되다가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막혀버린 듯한 상황을 어느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상황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삶에 다가오는 갑작스러운 위기와 아픔, 고통과 고난을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이 상황속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지,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 왜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갑작스러운 고난과 환난속에서 우리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합니다. 원치 않는 상황조차도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제하신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 상황에 압도되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있는 자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5.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수많은 영적인 체험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소위 말해서 입신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삼층천에 올라가서 환상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능력과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를 좌절시키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작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자신의 사역이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제발 이 육체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사람도 살렸던 바울, 삼층천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영적인 경험을 했던 바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의 질병을 치유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남겨둔 것은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후서 4:17,18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4:17)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의 믿음은, 두려움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를 둘려싼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그분만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위에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들의 인생에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들이 있고, 문제들이 있으며, 위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능히 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분에 대한 두려움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결국에는 그 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두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힘겹게 하고, 염려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이제 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